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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과 遲川 崔鳴吉 <還鄕女 이야기> 최종수     2017-12-16 [20:14] count : 12209

여자들의 귀환 

 

이 숙 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6383, 인조의 조정에서는 병자호란 때 잡혀갔다 돌아온 부녀들을 처치하는 문제로 격론이 일어났다. 이른바 환향녀 논쟁인데, 발단은 신풍부원군 장유(張維)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외아들 장선징의 아내가 적진에서 돌아오자 절개를 잃은 며느리에게 조상 제사를 맡길 수 없다며 이혼을 청하는 단자를 올린 것이다. 당시 장유는 봉림대군의 장인으로 나라 어른의 자리에 있었다. 한편 속환된 딸의 아버지 한이겸은 사위가 새 장가를 들려고 한다며 노복을 시켜 격쟁하여 그 원통함을 호소했다.

 

피로인 협상차 심양에 갔다가 얼마 전 돌아온 좌의정 최명길은 장유의 주장에 알 만한 사람이 왜 저럴까 하는 심정이었다. 전란으로 인한 포로 부녀의 문제는 임진왜란 직후에도 대두되었지만, 당시의 왕 선조는 부녀들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완강했다. 법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족 중에 환향녀를 내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에 병자호란으로 인한 문제도 옛 판례를 따르기로 이미 결정이 났건만 유독 장유가 사사로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한 사람의 소원, 백 집의 원망

 

피로인들의 상황을 직접 본 최명길은 장유와 뜻을 같이하는 조정 대신들의 황당한제안에 대처하느라 고군분투한다. 그는 아내를 속환하려고 많은 사족이 함께 갔는데, 만나자마자 부부가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하기를 마치 저승 사람을 만난 듯 했다며 그곳 분위기를 전했다. 또 속환이 더뎌지자 자결하는 부녀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몸을 더럽혔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든 아니든 그녀들에게는 억울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최명길은 장유의 행위가 공익을 저해하는 것임을 에둘러 표현하는데, 한 사람의 소원이 백 집의 원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혼해도 된다는 명이 있게 되면 속환을 못할 사람들이 생기고, 많은 부녀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소원을 이루고 백 집에서 원망을 품는다면 어찌 화기(和氣)가 상하지 않겠습니까.(인조실록)

인조는 장유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니 들어 줄 수 없었다. 그가 아무리 당대최고 집안에다 왕실의 척족이라 하더라도 개별 가정의 감정에 국법을 희생할 수는 없었다. 장유 아들의 이혼을 허락하는 순간 도미노처럼 각 집안에 불어 닥칠 우환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좌의정 최명길은 집요하게 일국의 왕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공평해야 한다며 감시의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의 조정 회의를 기록한 사관(史官)의 관전평은 매우 황당하다. 절의를 금과옥조로 여겨온 예의지국이 비뚤어진 견해를 가진 최명길 때문에 오랑캐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인조실록)

 

환향녀 문제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지 6일이 지나 갑자기 장유가 죽었다. 환향녀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없던 것이 되었는데, 3년여 만에 이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장유의 부인인 김 씨가 남편의 뜻이라며 아들 내외의 이혼을 허락해달라는 상소를 제출한 것이다. 김 씨는 김상용의 딸이자 봉림대군의 장모이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김 씨 부인은 며느리의 타고난 성질이 못되어 시어른에게 순종하지 않고 또 편치 않은 사정이 있다고 했다.

 

이를 두고 영의정 홍서봉은 죽은 남편이 조정의 윤허를 받지 못하자 칠거지악을 내세워 뜻을 관철시키려는 것이라고 했다. ‘불순부모(不順父母)’는 칠거지악의 제1 조건이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의 소원이라며 떼를 쓰는 안사돈에게 국왕 인조는 이혼의 법을 고치기는 어려우므로 장선징이 훈신의 독자임을 감안하여 특례로 이혼을 허락하고, 그 외 어떤 이혼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영을 내렸다. 장선징은 결국 환향녀인 아내와 이혼했다. 장선징이 선례가 되어 대부분의 사람은 사대부의 가풍에 누가 될까 환향한 부인과 갈라섰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환향녀의 절개를 따지는 동안 사대부들이 져야 할 전란의 책임은 흐지부지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들 장훤과 생이별을 당한 장선징의 아내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다만 30년 후 아들 장훤은 9품 하급 관직마저도 힘겨운 상황이 된 것이다. 환향녀의 아들이라는 주장에 생모와는 연이 끊어져 계모의 자식임을 증명하자 천륜을 저버린 배은망덕한 자식으로 다시 공격을 받는다. 조부가 쳐 놓은 프레임에서 손자는 대책 없이 허우적거리고 있는 형상이다.

 

다시 말해 명망가문의 일원인 장유 부부는 백 집의 원망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더구나 자신들의 불편한 심기를 해소하기 위해 국법을 좌지우지했다. 절의나 가풍에 집착한 그들의 상황을 굳이 이해하자면, 우선 장유는 삼전도 비문을 쓴 일로 사론(士論)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또 김 씨는 아버지 김상용의 죽음이 순절이 아니라 화약고에 담뱃불을 잘못 던져 폭발하는 바람에 사고를 당한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당시 김상용의 순절을 주장하는 제문이 올라오자 국왕 인조는 태산처럼 의리를 무겁게 했다말에 이르러 칭찬하는 말이 참되어야 죽은 자가 영화롭고 산 자가 사모할 것이라며 그의 순절을 인정하지 않았다.

 

전란을 발생시키고 전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결과 수많은 부녀가 적진으로 끌려갔다. 적들은 신분이 높은 여자들을 주로 골라갔는데, 여자라 힘이 약한 데다 나중에 속환비를 넉넉하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고 살아서 돌아온 피로인들에게 박수로 맞이하지는 못할망정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너무 가혹해 보인다. 지성의 역할을 방기한 남성 사대부들의 한계이기도 하다. 절의와 예의의 이름으로 환향녀를 공식화하여 결과적으로 백 집의 화기(和氣)를 상하게 했지만 그들에 대한 기록은 찬양 일변도다. 장유를 일러 조정에서는 명신(名臣)이었고 임금의 장인이었으며, 공훈은 마원과 등애를 능가하고 문장은 한유와 구양수를 앞질렀다고 썼다. 여기서 지성의 힘이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한다.

 

프랑스의 빅토르 위고(1802~1885)는 영불 연합군이 베이징의 원명원을 약탈하고 파괴한 그 야만에 치를 떨었다. 공개서한을 통해 문명프랑스와 영국의 행위를 공론화한 것이다.

 

예술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이데아는 유럽의 예술을 낳았고 환상은 동양의 예술을 낳았습니다. 특히 원명원은 거의 초인적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의 상상력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이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몇 대에 걸친 인고의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한 개의 도시만큼이나 거대한 이 위대한 건축물은 몇 세기에 걸쳐 건설되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였습니까? 인류를 위해서였습니다. 시간의 창조물은 인류의 것입니다. 어느 날 두 강도가 원명원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는 약탈했고 또 하나는 불을 질렀습니다. 역사는 그 두 강도 중 하나를 프랑스라고 부를 것이고 다른 하나를 영국이라고 부를 것입니다.(함재봉, 한국사람 만들기Ⅰ』)

 

청 말의 사상가 담사동은 윤리 없는 서양을 꾸짖기에 여념이 없는 중국인들의 교만을 부끄러워하며 우리 제발 그러지 말자고 했다. 개항기의 박규수는 걸핏하면 동방예의지국을 일컫는 우리나라 유자들에게 일침을 놓았다. “천하만고(天下萬古)에 예의 없는 나라가 어디 있나? 중국인들이 오랑캐치고 예의 있다고 한 것이니 매우 비루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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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탐방85>최명길(崔鳴吉:1586~1647) 만사절대성(萬事絶對性)을 부정한 큰 정치가 작성일 : 09-04-24 09:23

인조16년(1638) 6월13일, 이날 대궐 빈청에서는 기막힌 일이 논의 되었다.
오랑캐들에게 잡혀 갔다가 돌아온 부녀자들 처리를 다루는 일이었다.
살아 오기는 했으나 정절을 잃은 수많은 여인들을 가족들 마져 거두기를 꺼리니 큰 사회문제였다. 이에 임금 인조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그들 ‘환향녀(還鄕女)’들을 모두 청계천에 몸을 깨끗이 씻게하여 받아들이도록 하라고 명을 내리니, 어명으로 허물이 바래지기는 했으나 그들은 ‘화냥년’으로 변음 되어, 세계에서 유일하게 난잡한 여인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부랑인이 많아 호적을 정리하는 일을 중단하고, 청나라의 비위에 맞게 모든 문서는 청나라 연호를 쓰고, 남한산성을 헐기로 했다. 전란통에 소를 잃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자 몽고에서 긴급히 180여 마리의 소를 사들여와 평안도 각 고을에 나누어 주었다.
이런 사정 가운데서 주화파의 좌장 최명길이 53세 비교적 젊은 나이로 영의정에 올랐다.

최명길은 세조때의 명상 최항(崔恒)의 후손으로 본관이 전주, 영흥부사 최기남(崔起南)의 아들로 충청도 청주에서 태어났는데, 외조부가 참판 유영립(柳永立)이었고, 아내가 도원수 장만(張晩)의 딸이었다. 그는 영의정 이항복·신흠 문하에서 배워, 선조38년(1605) 20세 나이에 문과에 올라 승문원에서 관직을 시작하였으나, 광해군때 대북파에 밀려 삭탈관직 당했다가 인조반정에 가담, 정사1등공신에 들어 권력의 핵심에 자리를 잡았었다.

최명길은 대동법 시행, 서얼의 등용, 토지제도 개혁 등, 새로운 정책 개발로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 주려 무던히 애를 썼다. 그는 대신들이 서로 주장을 내 세워 다툴 때 이른바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으로, 「두쪽이 모두 옳은 점도 있고, 그른 점도 있다」는 뜻에서, 만사절대성(萬事絶對性)을 부정하는 철학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인조10년 이조판서 겸 양관대제학까지 역임했던 최명길이, 호조판서로 국가 재정을 다룰때 병자호란이 덮쳤는데, 좌의정 김상헌 등의 주전론이 팽배한 가운데서, 홀로 승산없는 전쟁을 그만 두고 시달리는 백성들을 살리자는 주화론을 펼쳐 백성들의 희생을 크게 줄였다.

인조16년 9월 영의정에 오른 최명길은, 청나라 사신으로 적도에 들어가 적의 과도한 요구를 슬기롭게 막아 나라의 부담을 덜었다. 인조18 년 자리에서 물러났던 최명길은 그해 11월 또 한번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이듬해 8월 두 번째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의 명나라 내통사실이 들어나고 국내의 반청세력이 들썩이자, 분개한 청나라는 국정책임자 최명길은 불러 2년 동안을 옥에 가둔 채 핍박을 가하니, 그는 몸을 가누기가 힘겨울 만큼 심신이 상해 버렸다.

인조23년(1645) 2월 최명길은 소현세자와 함께 풀려 나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추스릴 새도 없이 국정에 힘을 쏟다가, 인조25년 5월 파란만장한 생애 62세로 눈을 감고 말았다.
최명길이 지친 나머지 자리에 눕자 인조는 밤중에 의관을 보내, 불우한 대신의 병세를 살피게 하니, 그는 눈물을 흘리며 왕의 문병을 고마워하면서도 일어나질 못했다. 최명길의 부음을 전해들은 인조는 마음이 상해 닷새동안 제대로 음식을 들지 못했고, 여러날 조회를 폐한 채 신명을 바친 신하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그는 허례와 명분만 내세우는 풍조에서 실질을 구하며,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몸을 바친 재상이었기에, 임금이 특별히 내린 장생전(長生殿) 관(棺)속에 누워 고향 청주땅으로 돌아가 묻히니, 문충공(文忠公)으로 시호가 내려졌다.

최명길은 작은 일에는 마음을 두질 않아 세상 물정에 매우 어두웠다. 푸른색과 초록색을 구분하지 못했고, 어느날 조카가 탄 당나귀를 보고 “네 말은 귀가 어찌 그리 기냐?”고 했다. 그가 호조판서였을때 산하 관청에서 기와 500장을 달라 했더니, 그는 “500장은 너무 많으니 한 우리만 주라”했다. 한 우리는 기와 1,000장인 것을 100장인 줄 알았었기에 모두 웃었다. 호란때 대신들이 둘러 앉아 항복문서를 썼는데, 좌의정 김상헌이 통곡하며 문서를 찢어 버리자, 최명길은 찢어진 항복문서를 집어 이으며, “이를 찢는 사람이 없어서도 안 되고, 또 이를 주워 붙이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된다”며 그도 또한 목을 놓고 울었다.

최명길의 형 내길(來吉)은 공조판서, 아우 혜길(惠吉)은 이조판서였고, 아들 후량(後亮)은 한성부좌윤에 이르렀다. 최명길의 손자인 후량의 아들 석정(錫鼎)은 숙종때 여덟 차례나 영의정자리에 오르내린 명신이며, 석정의 아우 석항(錫恒)도 좌의정까지 올라, 형제정승으로 가문을 빛냈다.
오늘날의 충청도 청원 북이면 대율 최명길의 묘소에는 영의정 남구만이 지은 비명이 있고, 1702년에 세운 신도비는 이조판서 박세당(朴世堂)이 짓고 손자 석정이 전자를 썼으며, 증손 홍문관교리 창대(昌大)가 글씨를 썼는데, 충청북도 유형 문화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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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4 [09:05]
곰솔sk ◈국조인물고⑯崔鳴吉⋗→碑銘 13CD5CBA85AE38B1586X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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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 [ 崔鳴吉 ] 원본글 출처 최명길의 비명(碑銘)-저자 남구만(南九萬)-이명자 : 자겸(子謙)시호 : 문충(文忠)-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60 계해 거의인(癸亥擧義人)
⋗옛날 인조(仁祖) 중흥(中興) 때 여러 신하들은 그 충성이 족히 자신의 몸을 잊을 수 있고 그 재주가 족히 사물을 운행할 수 있고 그 밝음이 족히 일을 꿰뚫어 볼 수 있고 그 용맹이 족히 기회를 결정할 수 있는가 하면 치욕을 참고 위험을 무릅쓰면서 끝내 죽고 사는 것이나 칭송과 비난으로 인해 중심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종사(宗社)로 하여금 망하지 않게 하고 백성으로 하여금 죽지 않게 한 사람은 실로 지천(遲川) 최 상국(崔相國)이었다. 그러나 공이 처하였던 바를 보고 그 효과를 궁구해 보면 비록 상황과 착착 잘 들어맞았지만 그 일을 따져보면 모두 여러 사람들의 의견과 같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공로를 엄폐할 수 없고 그 비방 또한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로 고충의 마음과 피나는 정성을 임금에게 다 바쳐 얽매인 견해를 초월하지 못하고 필연적인 계책이라고 믿지 않았다면 그 누가 온 세상 사람의 비난을 다 받으면서 확연히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공이 세상을 떠난 지 지금 40여 년이 되자 공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선생이나 장자들이 점차로 공을 일컬은 말을 하고 있으며, 공의 후배인 학사(學士)나 대부(大夫)들이 공에 대해 평론하는 말이 점점 공평해졌다. 그런가 하면 공에게 내린 포상의 시호(諡號)에 대해 조정의 이의가 없었으니, 정말로 그 실적이 있으면 결국 반드시 저절로 밝혀진다는 말을 과연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공의 이름은 명길(鳴吉)이고 자는 자겸(子謙)이다. 그의 선대 계통은 전주(全州)에서 비롯되었는데, 고려 시대부터 본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분들이 줄줄이 나왔다. 증조 최업(崔嶪)은 빙고 별제(氷庫別提)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의 벼슬을 추증받았고, 할아버지 최수준(崔秀俊)은 좌찬성(左贊成)의 벼슬을 추증받았다. 아버지 최기남(崔起南)은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영의정(領議政)의 벼슬을 추증받았고 호는 만옹(晩翁)으로서 문학과 덕행으로 저명하였는데, 장 계곡(張谿谷, 장유(張維)) 공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썼다. 전주 유씨(全州柳氏) 관찰사(觀察使) 유영립(柳永立)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4명을 두었는데, 공이 그중 둘째 아들로서 만력(萬曆) 병술년(丙戌年, 1586년 선조 19년)에 태어났다.⋗공은 을사년(乙巳年, 1605년 선조 38년)에 생원시(生員試)는 1등으로, 진사시(進士試)는 8등으로 합격한 다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선발되었다. 기유년(己酉年, 1609년 광해군 원년)에 한원(翰苑)에 추천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강석(講席)에 나가지 못하고 전적(典籍)으로 승진되었다. 그러나 그때 광해(光海)가 부르지 않았으므로 오랫동안 낭서(郞署)에서 맴돌다가 어떤 사건으로 인해 체포되어 관작을 삭탈당하고 축출되었다.⋗그러다가 인목 대비(仁穆大妃)가 유폐되어 종사가 기울어지려고 하자 맨 먼저 발의한 제공들과 같이 은밀히 큰 계책을 정하였다가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 봄에 스스로 점을 쳐보고 군대를 출동할 날짜를 정하였다. 조정이 깨끗하고 밝아져 초기의 정사에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임명되었다가 정랑(正郞)으로 전직되었고 참의(參議)로 승진되었다. 그리고 일등 공신에 책정되어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지고 참판(參判)에 임명되어 비국 제조(備局提調)를 겸임하였다.⋗이듬해 갑자년(甲子年)에 서북의 장수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공으로 하여금 총독부사(摠督副使)의 임무를 띠고 원수(元帥)의 군영으로 가도록 하였는데, 안현(鞍峴)의 전쟁 때 전략을 많이 짜 도왔다.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가 대사헌(大司憲)으로 전직되었다.⋗병인년(丙寅年, 1626년 인조 4년) 계운궁(啓運宮, 인조 생모 구씨(具氏)의 추존되기 이전 궁호(宮號))의 상(喪)이 났을 때 차자(箚子)를 올려 상복(喪服)을 강등하는 것과 후사를 세우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논하였다. 그리고 또 계운궁의 장사는 선비의 예에 따라 치르고 제사는 제후의 예에 따라 지낼 것과 별도로 사당을 세워 스스로 제사를 주관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 의논이 조정의 의논과 달랐으므로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다.⋗이듬해 정묘년(丁卯年)에 청(淸)나라 병력이 대대적으로 들어오자 국서를 보내 강화를 요청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이미 자강(自强)하지도 못한 데다가 또 약자도 되지 못하면 어떻게 나라를 부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청컨대 말을 유순하게 하여 닥뜨려 싸움을 늦추소서.” 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와서 주상을 보려고 하자 공이 또 말하기를, “양쪽의 병력이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사신이 그 중간에 있으니, 뜻을 굽혀 한번 접견하소서.” 하였다. 적병이 물러가자 언로(言路)에서 강화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유배할 것을 청하니, 주상이 단지 추고(推考)하라고만 명하였다.⋗계운궁의 담제(禫祭)를 지낸 뒤에 신주(神主)를 사가(私家)의 사당에 모시려고 하자 공이 전에 주장한 의논을 거듭 말하니, 홍문관(弘文館)에서 크게 배척하였다. 이에 외직을 요구하여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나갔는데, 경기의 백성들이 공의 선정(善政)에 크게 힘입었으므로 비석을 세워 칭송하였다.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전직되었다가 병조(兵曹)로 옮기었고 우참찬(右參贊)으로 승진되었다.⋗신미년(辛未年, 1631년 인조 9년)에 주상이 장릉(章陵, 인조의 생부 원종(元宗))을 소급해 높이고 싶었으나 신하들의 간쟁으로 어려울까봐서 먼저 명(明)나라에 아뢰어 결정지으려고 하자 대신이 또 불가하다고 하니, 주상이 특별히 공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임명하였다. 이는 대체로 공이 주장한 별묘(別廟)의 의논은 조정의 의논에 비해 더 융숭하였기 때문에 주상이 공의 말을 많이 인용하여 조정의 의논을 꺾고 또 공을 끌어다가 스스로 힘쓰게 하려는 것이었다. 공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소급해 높이는 일은 근거로 들 만한 예가 없고 조정의 의논이 또 일치되지 않았으니, 명나라에 먼저 아뢰어서는 안 됩니다.”고 하였다.ㅡㅡ이듬해 임신년(壬申年)에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임명되어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겸임하였다. 사가의 어버이를 소급해 높이는 의논이 또 예조에 하달되었으나 공이 예전의 견해를 고수하니, 주상이 엄하게 질책하였다. 대체로 공이 청한 바는 오직 별묘에 있었는데, 이보다 감하면 상복(喪服)을 강등하게 되고 이보다 더하면 소급해 높이는 것이 되므로 모두 공이 뜻한 바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조정의 의논과 어긋났고 나중에는 주상의 뜻을 거스른 것이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었ㅡㅡ계유년(癸酉年, 1633년 인조 11년)에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 체찰부사(體察副使)를 겸임하였다. 을해년(乙亥年, 1635년 인조 13년)에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전직되었고 이듬해 병자년(丙子年)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임명되었으나 병환이 나 부임하지 않았다가 한성 판윤(漢城判尹)에 임명되었다. 그때 청나라 사람이 참람하게 황제의 호칭을 쓰고 사신을 보내자 조정에서 의리에 근거하여 배척하니, 청나라 사신이 노하여 곧바로 가버렸다. 공이 말하기를 “전쟁의 빌미가 발생하였으니, 사전에 전쟁과 수비의 대책을 강구하소서.” 하고, 또 ‘빨리 사신을 보내어 청나라의 사정을 엿볼 것’을 청하였으며, 말하기를, “나라의 큰일은 모름지기 심복의 대신들과 상의해야 하고 승지(承旨)나 내관(內官)은 모두 들어서는 안 됩니다.”고 하였다. 그때 조정의 의논이 거세게 나와 모두 강화를 배척하였으나 공만 혼자 달랐기 때문에 들어가면 경연(經筵)의 신하들이 번갈아 나무라고 나가면 대각의 관료들이 번갈아 탄핵하였다. 그러나 공은 더욱더 극력 말하면서 선유(先儒)의 정론(定論)을 증거로 대기도 하고 선왕조의 지난 행적을 참고로 대기도 하는 등 수만여 말이나 되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었다.ㅡㅡ11월에 청나라 임금이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쳐들어왔는데, 선봉이 압록강을 건넌 지 며칠 만에 서쪽의 교외로 들이닥쳤다. 주상이 강도(江都)로 가려고 숭례문(崇禮門)에 이르자마자 청나라 기병(騎兵)이 이미 길을 막아버렸다. 주상이 문루(門樓)로 나아가 여러 신하들을 불러 계책을 물으니, 공이 나아가 말하기를, “일이 급박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달려가 청나라 장수를 만나 맹약을 어긴 것을 책망하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청나라 장수가 듣지 않으면 신이 마땅히 그의 말 발굽 아래에서 죽을 것이고 다행히 접견하여 말대꾸를 해주면 조금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입니다. 주상께서는 그 틈을 타 어가(御駕)를 동쪽으로 돌려 빨리 달려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소서.” 하니, 주상이 윤허하고 금군(禁軍) 20명을 떼어주었는데, 숭례문을 나가자마자 모두 조수(鳥獸)처럼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공이 말을 달려 사현(沙峴)에 이르러 청나라 장수를 만나 군대를 동원한 것을 힐책하니, 청나라 장수가 강화와 전쟁 두 가지 중에 하나를 결정하라고 요청하였다. 공이 일부러 말을 질질 끌다가 해가 기울어서야 도성으로 돌아와 청나라 장수의 말을 행조(行朝)에 아뢰었다. 그 이튿날 저녁 무렵에도 아무런 회답이 없자 청나라 장수가 공이 자기들을 기만하였다고 해치려고 하였으나 되지 않았다.ㅡㅡ공이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결과를 보고하니, 주상이 공의 손을 붙잡고 울먹였고 공도 눈물을 흘리며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청나라 군대가 성 아래에 이르러 여전히 사람을 보내어 강화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공격과 강화의 의논이 더욱더 거세졌기 때문에 조정에서 그 두 가지를 가지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공이 분발하여 말하기를, “오늘날의 계책은 오직 강화냐 전쟁이냐 이 두 가지 일뿐인데, 전쟁을 하려고 하면 힘이 미치지 않고 강화를 하려고 하면 두려워서 감히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성이 함락되어 상하가 어육(魚肉)이 되어버린다면 장차 종사는 어느 곳에다 둔단 말입니까?” 하였다. 오랑캐가 성을 더욱더 급하게 포위하여 여러 번 함락되려고 하자 사람들의 마음이 상실되어 대부분 강화의 의논을 따랐다. 김상헌(金尙憲)공이 강화의 문서를 찢으며 통곡하니, 공이 주어서 맞추면서 말하기를, “강화의 문서를 찢는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지만 찢어진 문서를 맞추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하였다. 강도(江都)가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이르자 드디어 남한산성의 아래에서 강화의 맹약을 하였다.ㅡㅡ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년) 4월에 우의정(右議政)으로 승진되었다. 그때 눈앞에는 잿더미가 가득하고 모든 일들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공이 위로는 임금의 마음을 위로하여 권면하고 아래로는 조정의 정사를 미봉해 나가니, 안팎이 조금 안정되었다. 그해 가을에 좌의정(左議政)으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무인년(戊寅年)에 영의정(領議政)으로 승진하였다.ㅡㅡ이보다 앞서 청나라와 맹약을 체결할 적에 공이 이미 청나라가 명(明)나라를 칠 때 우리나라가 군대를 출동하여 도울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그 뒤 얼마 안 되어 그들이 와서 군대의 지원을 요청하였으므로 공이 스스로 심양(瀋陽)으로 달려가 전에 한 말을 인용하여 그들의 요청을 막아버렸다. 그들이 또다시 와서 병력의 지원을 요청하면서 큰소리로 협박하자 공이 말하기를, “군대를 지원하는 것과 성을 내려가 항복하는 것은 다르니, 나라가 망하더라도 의리상 따를 수 없다. 우리나라 대신 중에 한두 사람이 이를 위해 죽은 사람이 있어야 바야흐로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을 것이다.” 하고 다시 심양으로 달려가 자신이 그 책임을 감당하게 해달라고 청하니, 주상이 표범 갓옷 한 벌을 하사한 다음 직접 만나 말하여 보냈다. 공의 생각에 이번 행차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 리가 없다고 여겼으므로 염습의 물건을 준비해 가지고 갔다. 공이 심양에 도착하여 항의하며 굽히지 않으니, 청나라 임금이 의롭게 여기어 풀어주었다.ㅡㅡ기묘년(己卯年, 1639년 인조 17년)에 주상이 오래도록 병석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무고(巫蠱)의 사건이 발생하여 정명 공주(貞明公主)의 집과 연루되자, 주상이 밀지(密旨)를 내려 공으로 하여금 그 옥사(獄事)를 끝까지 조사하려고 하니, 공이 불가하다 하였고 사안이 하달되자 또다시 간쟁하여 별궁(別宮)으로 거처를 옮길 것만 청하였다. 이로 인해 옥사가 결국 만연되지 않았으나 주상이 여전히 공에 대한 노여움이 풀리지 않아 특별히 성절사(聖節使)로 차출하였다. 공이 의주(義州)에 이르러 들어보니, 홍문관에서 올린 차자(箚子)에 대해 내린 비답에, “닭을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대관(臺官)이 공을 탄핵하지 않고 다른 일을 언급하였기 때문이었다. 공이 행차를 멈추고 파직해 줄 것을 청한 데다가 병환이 또 심하였으므로 조정에서 부사(副使)로 하여금 성절사를 대행하도록 하였다.ㅡ경진년(庚辰年, 1640년 인조 18년)에 체직되었고 사건에 연좌되어 재차 파직되었다가 임오년(壬午年, 1642년 인조 20년)에 다시 영상이 되었다. 남한산성에서 내려가 막 강화할 때 공의 생각에 나라가 뜻을 굽혔다는 뜻으로 도독(都督) 진홍범(陳弘範)에게 공문을 보내 명나라에 전달되게 하려고 하다가 공문이 중간에 유실될지 알 수 없었으므로 명나라에 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을 구하려고 하였다. 그때 마침 우리나라 중 독보(獨步)란 사람이 홍 승주(洪承疇)의 군영으로부터 일을 알아보기 위해 동래(東來)하였으므로 공이 그에게 공문을 주어 홍 군문(洪軍門)에게 전달하도록 한 다음 평안 병사(平安兵使) 임경업(林慶業)으로 하여금 배를 준비해 들여보내도록 하였다. 그런데 신사년(辛巳年, 1641년 인조 19년) 가을에 그가 회답의 공문을 가지고 왔다. 그때 공이 이미 영상에서 물러나 있었으므로 답서를 써서 그에게 부쳤다. 청나라 사람이 멀리서 바다의 배를 바라보고 우리가 명나라와 내통한 줄로 의심한 나머지 와서 힐문하였으므로 많은 돈을 들여 그 일을 무마시켰다. 이때에 이르러 홍승주가 청나라에 항복하여 독보가 오고간 일을 자세히 말해버렸는데, 우리나라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그때 마침 선천 부사(宣川府使) 이규(李烓)가 은밀히 명나라 상선과 거래한 일이 발각되어 청나라 장수가 세자(世子)를 데리고 봉성(鳳城)에 와서 머물면서 이규를 붙잡아다놓고 힐문하였다. 이규가 은밀한 일을 고하여 살아보려고 공이 독보를 보낸 일을 말하자, 청나라 장수가 공을 붙잡아다 대질 심문을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사건이 반역의 신하 입에서 나왔으니만큼 다른 증거가 없으니,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저들이 이미 바다에 있는 배를 엿보고 알았으니, 또 증거를 안 얻었으리라고 반드시 보장할 수 없다. 처음에 속였다가 결국 드러나면 그 사건이 필시 임금에게 미칠 것이니, 속이지 않는 것이 낫겠다. 나와 임(林) 두 사람만 죽으면 그 화를 막을 수 있다.”고 하였다. 주상이 공을 위로하고 백금과 담비 갓옷을 주어 보냈다. 공이 봉성에 이르러 대질 심문할 때 말하기를, “배를 구하여 중을 보낸 일은 오직 나와 임경업만 같이 하였다. 임금이 명한 것이 아니고 조정의 신하들도 참여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청나라 장수가 공이 대답한 공초를 심양에 보내니, 청나라 임금이 공에게 형구를 씌워 데려오도록 한 다음에 북관(北館)에다 구금해 놓았다. 북관은 사형수를 가두어놓은 옥이었는데, 계미년(癸未年, 1643년 인조 21년)에 비로소 남관(南館)으로 옮기었다. 그때 김 청음(金淸陰, 김상헌(金尙憲))공과 이경여(李敬輿) 상공(相公)이 전후로 붙잡혀 와 한 곳에 있었다. 심양에 있는 어떤 중국 사람이 우리들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나라에 두 명의 각로(閣老)와 한 명의 상서(尙書)가 모두 명나라를 위해 붙잡혀 왔으니, 동방의 절의가 존경스럽다.”고 하였다.ㅡㅡ을유년(乙酉年, 1645년 인조 23년)에 청나라가 이미 연경(燕京)을 점령하고 세자와 대군을 돌려보냈다. 공도 김 청음ㆍ이경여 두 분과 같이 돌아와 고향으로 물러갔는데, 어영 제조(御營提調)에 임명하여 불렀다. 이듬해 병술년(丙戌年)에 폐서인된 강씨(姜氏)에게 사약을 내리자 공이 은정을 온전히 할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ㅡㅡ공이 정해년(丁亥年, 1647년 인조 25년) 5월에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주상은 3일간 조회를 중지하고 5일간 고기 반찬을 먹지 않았다. 주상과 세자가 각각 내관(內官)을 보내어 장례를 치를 때까지 호상(護喪)하였는가 하면 부조를 하거나 제사를 지내는 등 애도하는 바가 관례보다 더 후하게 하였으며 삼년상이 끝날 때까지 녹봉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청주(淸州) 대율리(大栗里) 감좌(坎坐)의 묏자리에 장례를 치렀다.ㅡㅡ전부인 인동 장씨(仁同張氏)는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옥성 부원군(玉城府院君) 장만(張晩)의 딸이고, 후부인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종묘서 영(宗廟署令) 허인(許嶙)의 딸인데, 그 또한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모두 공의 묘소 옆에 묻히었다. 장 부인이 아들이 없어 공이 조카 최후량(崔後亮)을 후사로 삼았는데, 그 뒤에 허 부인이 아들 최후상(崔後尙)을 낳았다. 이보다 앞서 나라 풍속이 후사를 세운 뒤에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이 제사를 주관하였다. 그런데 공이 말하기를, “이미 아비와 자식이 정해지면 저절로 천륜(天倫)의 순서가 있으므로 바꿀 수 없다.” 하고 조정에 청하여 최후량을 후사로 삼아 세대를 이어가도록 하니, 예를 아는 사람들이 옳게 여기었으므로 이를 기록해 조령(朝令)으로 삼았다. 이에 최후량이 관작을 이어받아 완릉군(完陵君)에 봉해졌다. 큰아들 최석진(崔錫晉)은 현감(縣監)이고, 둘째 아들 최석정(崔錫鼎)은 참판(參判)이고, 셋째 아들 최석항(崔錫恒)은 지평(持平)이다. 큰딸은 진사(進士) 윤제명(尹濟明)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선비 신곡(申轂)에게 시집갔다. 최후상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인데, 최석정(崔錫鼎)을 후사로 삼았다.ㅡㅡ공은 안으로 정신이 밝고 밖으로 영화(英華)가 드러났다. 비록 몸은 옷도 가누지 못할 것 같고 말을 입에서 꺼내지 못할 것 같았지만 큰 의리나 큰 어려움에 당면할 경우에는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갔지 양쪽의 사이에서 머뭇거리거나 여러 사람의 말로 인해 의지를 상실하지 않았다. 젊어서부터 성리(性理)에 대한 글에 몰두하여 안으로 기를 함양하고 밖으로 말을 쏟아냈는데, 개연(慨然)히 당시의 세상에 뜻이 있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ㆍ현헌(玄軒, 신흠(申欽)) 두 상국(相國)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는데, 그분들이 모두 원대한 그릇으로 허여하였다. 그리고 포저(浦渚, 조익(趙翼))ㆍ계곡(谿谷, 장유(張維))ㆍ연양(延陽, 이시백(李時白)) 세 상공(相公)들과 일찍이 친밀한 벗을 삼았는데, 세상에서 사우(四友)로 지목하였다.ㅡㅡ공이 중흥(中興)을 만나 요직에 앉자 매양 근본을 깨끗이 하여 인재를 진출시키고 관제(官制)를 고쳐서 피폐된 정사를 다스리어 안으로 정교(政敎)를 닦아 외침을 막으려는 계획을 하였는데, 임금과 상국의 뜻이 이미 변통하는 것을 어렵게 여긴데다 공도 예송(禮訟)에 시달리고 화의(和議)에 격동된 바람에 마치 네모난 촉꽂이를 둥근 구멍에 끼우는 것처럼 한 세상과 서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므로 끝내 그 뜻한 바의 사업을 크게 펼쳐보지 못하였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별묘(別廟)의 의논은 모두 경사(經史)에 의거한 것으로서 공이 억측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므로 소급해 높이는 것과는 본디 관계가 없다. 그리고 약한 나라가 보존을 도모한 계책도 피차를 헤아려 사세를 뚜렷이 본 데서 나온 것이니, 요컨대 종사를 중히 여기고 일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공연히 명(明)나라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 연호) 때와 송(宋)나라 정강(靖康, 송 흠종(宋欽宗) 연호) 때를 천고의 지극한 경계로 삼아 공을 똑같은 데로 몰아넣어 싸잡아 비난하였으니, 또한 심하지 않은가? 상국(相國)에 임명됨에 있어서는 임금의 마음과 나라의 권력이 오직 공에게 의탁되어 있었으므로 패망을 구하고 기울어진 것을 일으켜 세운 공로와 위태로움 속에 몸을 던져 주상을 받든 절개에 대해서는 정말로 그 정론이 있겠지만 최고의 지위에서 임무를 전담하여 책망이 더욱더 집중되었기 때문에 지나치게 요구하는 말이 또한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공이 영상의 임무를 맡았을 때 이경여 공이 공에게 찾아가 대뜸 공의 과실에 대해 말하면 더러 5, 6건의 일에 이르기도 하였는데, 공이 자신의 과실로 받아들인 것이 반이 넘었다. 유백증(兪伯曾)공은 공의 과실에 대해 기를 잔뜩 부리고 책망한 다음에 상소의 초안을 꺼내놓고 말하기를, “내가 지금 공을 탄핵하려고 하는데, 숨길 수 없었다.”고 하니,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으니, 내 마땅히 고치겠다.”고 하였는데, 이렇게 자리가 끝날 때까지 화평한 기색이 넘쳐흐르다가 떠났다. 아! 제갈공(諸葛公, 제갈량(諸葛亮))이 남에게 자신의 과실을 부지런히 공격하도록 허락하였기 때문에 승상의 업적이 남보다 크게 뛰어났던 것이다. 이점으로 인해 내가 공에 대해 과실을 없게 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지 않고 오직 자신의 과실을 듣기 좋아한 것을 통쾌하게 여기었다.ㅡㅡ공은 문장에 대해 통투한 바를 천성적으로 타고난 데다 반드시 이치를 위주로 삼아 저절로 일가(一家)를 이루었고, 주의(奏議)의 글은 특히 필단(筆端)에 혀가 있다고 일컬어졌다. 공이 저술한 시문(詩文) 19권은 세상에 간행되었고 ≪경서기의(經書記疑)≫ 몇 권은 집에 간직되어 있다.ㅡㅡ이 연양(李延陽) 상공(相公)이 가장 공을 잘 안다고 알려졌는데, 그분 말씀에, “지천(遲川)의 사업 중에 큰 것을 들자면 반정(反正)하여 광복(匡復)의 업을 협찬한 것이 하나이고, 예를 의논하여 부자(父子)의 윤리를 밝힌 것이 둘이고, 혼자 말을 달려 적진으로 가 적의 공격을 늦춘 것이 셋이고, 비방을 무릅쓰고 강화를 주장하여 종사를 보존한 것이 넷이고, 재차 호랑이의 입속으로 들어가 병력의 요청을 극력 저지하면서 목숨을 버린 채 변하지 않은 것이 다섯이고, 명나라에 서신을 보냈다가 결국 위기를 당하여 죽음으로써 스스로 감당한 것이 여섯이다.”고 하였다. 이경여(李敬輿) 상공이 말하기를, “굴자(屈子,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굴원(屈原))의 충성은 충성스러우면서도 지나치고 지천의 충성 또한 충성에 지나친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 역시 공을 아는 자라고 이를 만하다. 지금 주상 7년에 이르러 비로소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다. 나는 빈한한 시골의 후배로서 공의 문하에서 수업하지 못하였지만 공의 큰아들과는 마천(馬遷), 풍수(馮遂)와 같은 정의가 있기 때문에 감히 사실을 뽑아 서술하고 이어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ㅡㅡ성조(聖祖)가 용처럼 흥기하니 신하들이 물고기처럼 모두 뛰었도다. 그 누가 그 힘을 다하였는가? 목숨을 나라에 바치었도다. 최공을 만나니 실로 왕의 계책을 보필했도다. 기강을 진작시키어 사전에 대비하려고 도모했도다. 임금의 신임을 얻고 지위도 얻으니 의당 일을 할 것 같았도다. 일이 공평하기 어려우니 예로부터 탄식한 바였도다. 나라의 안팎에 연고가 많으니 조정의 의논이 분열되었도다. 십수 년 동안 그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의심하였으나 공은 자신하였도다. 남들은 회피하는 바를 공은 분발하였도다. 스스로 기꺼이 대중의 비난거리가 되었도다. 하고 싶은 것이 충성이니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있겠는가? 남문(南門)에서 대책을 결정하니 용감하게 적병의 칼날을 막았도다. 북관(北館)으로 붙잡혀가니 조종(朝宗)의 의리가 컸도다. 오(吳)나라와 강화를 맺으니 범려(范蠡, 춘추시대 월(越)나라 신하)가 스스로 자신의 죄를 알았도다. 감히 연(燕)나라를 도모할 수 없으니 악의(樂毅, 전국시대 연(燕)나라 장수)의 마음을 질정할 수 있도다. 공의 시작과 끝은 마치 포를 씹는 것처럼 독이 많았도다. 허물이 없었으니 오직 뜻이 확고했도다. 옛날 세상이 혼란할 때 용안을 알지 못했도다. 사람들이 먼저 알현하라 권하니 공은 못 들은 체했도다. 공이 병석에 누워있으니 궁중에서 의원을 보내어 병문안을 했도다. 도성의 문이 밤에 닫혔지만 믿음으로써 열었도다. 분수를 엄격하게 삼가니 특별히 은총을 내리었도다. 군신의 관계를 보고 싶으면 이것으로 요량할 만하도다. 편안과 위태로움을 같이 즐거워하고 걱정하니 살아서는 영광스러웠고 죽어서는 애도하였도다. 훈업과 문장은 불후의 이름이었도다. 안락한 이 언덕에 비석이 드높이 서 있도다. 좋은 시를 여기에 새기어 영원히 보이노라.
ㅡ관련이미지 (8)-국조인물고 최명길출처: 국역 국조인물고-1/8위 이미지에 대한 권리는 출처사이트 게시자에게 있으며, 이를 무단 사용할 경우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참고참조어 :국조인물고 해제- 출처국역 국조인물고, 1999.12.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국조인물고崔鳴吉⋗→碑銘
2018-02-04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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