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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실록최유경의 졸기생애와 활동0012012.02.07. 곰솔sk     2018-01-30 [11:28] count : 18370

   ***왕조실록최유경의 졸기0012012.02.07.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306024_001

   *태종 25,13(1413 계사/ 명 영락(永樂) 11) 624(신미) 1번째기사 전 참찬의정부사 최유경의 졸기

전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使) 최유경(崔有慶)이 졸()하였다. 최유경의 자()는 경지(慶之)이요, ()는 죽정(竹亭)이요, 전주(全州) 사람이니, 감찰 대부(監察大夫) 최재(崔宰)의 아들이었다. 홍무(洪武) 임자년에 판도 좌랑(版圖佐郞)2585) 에 임명되었는데, 그 때에 각도의 의염(義鹽)의 염분(鹽盆)2586) 이 모두 강호(强豪)에게 점령당하였으므로 최유경이 갖추 상서(上書)하여 아뢰어 모두 염창(鹽倉)에 속()하게 하였다. 환관(宦官) 윤충좌(尹忠佐)가 임금의 총애(寵愛)를 믿고 교만 방종하여 많이 불법을 행하니, 헌사에서 이를 묻고자 하였으나 능히 실행하지 못하였다. 최유경이 장령(掌令)으로 옮겨서 일을 보던 처음에 즉시 이를 탄핵하였다. 을묘년 여름에 전법 총랑(典法摠郞)으로 옮겼는데, 이사충(李思忠)의 가노(家奴)가 그 주인을 찔러 죽이려다 죽이지 못하였으므로 이사충이 이를 고소하여 고문(拷問)하기를 여러 차례 하였으나 그 실정(實情)을 얻지 못하였지만, 최유경이 사정을 들어서 차근히 물으니, 가노가 스스로 자복하여 실토하였다. 정사년에 아비의 상()을 당하여 여묘(盧墓)살이하면서 상제(喪制)를 마쳤다. 무진년 정월에 국가에서 권신(權臣) 임견미(林堅味) 등을 주살(誅殺)할 때 최유경을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로 삼아서 전민(田民)2587) 을 추고(推考)하여 바로잡게 하였다. 여름에 위주(僞主)2588) 가 군사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공격할 때에 최유경을 서북면 전운사 겸 찰방(西北面轉運使兼察訪)으로 삼았는데, 태조(太祖)가 의()를 들어 회군(回軍)하매, 온 조정이 모두 태조에게 붙었으나, 오로지 최유경은 말을 달리어 성주(成州)에 이르러 위주(僞主)를 뵙고 변란을 고하고 수종(隨從)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태조가 집정(執政)하여 최영(崔瑩)을 물리치고 최유경을 발탁하여 밀직 부사(密直副使)로 삼았다. 임신년에 우리 태조가 즉위하여 원종 공신(原從攻臣)으로 삼으니, 좌우(左右)에서 무진년의 일을 가지고 반대하는 자가 있었으나, 태조가 그 충의(忠義)를 칭찬하였다. 무인년 봄에 태조가 장차 평주(平州) 온정(溫井)에 거둥하려 하여 유휴사(留後司)2589) 에 어가(御駕)를 머물렀다가 정령(政令)이 해이한 것을 보고 즉시 최유경을 천거하여 유후(留後)로 삼으니, 최유경이 나아가서, “()이 일찍이 제릉(齊陵)에 봉향(奉香)하였는데, 수릉인(守陵人)과 제기(祭器)가 모두 미비하였습니다. 제릉(齊陵)이 선적(先嫡)인데 어찌 홀로 정릉(貞陵)에만 후하게 하십니까?” 하니, 태조가 내가 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유사(有司)에서 청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다. 최유경이 또 이 말을 가지고 도당(都堂)에 말하였다. 가을에 또 겸 경기우도 관찰사(京畿右道觀察使)가 되었다. 정사(定社)한 뒤에 이르러, 상왕(上王)이 즉위하니, 최유경을 꺼려하여 이를 헐뜯는 자가 있었는데 상왕이 이를 제지시켰다. 임금이 즉위하게 되자 또 대사헌(大司憲)을 삼았다. 병술년에 임금이 각사로 하여금 노성(老成)한 자로서 정부(政府)를 맡을 만한 자를 추천하라고 하니, 육조(六曹)와 대간(臺諫)에서 함께 최유경을 천거하므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삼았다. 정사를 사양하고 물러난 지 7년 만에 병으로 졸하니, 나이 71세였다.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시호를 평도(平度)라고 하였으니, 척당(倜儻)2590) 하여 용감히 말하고 남에게 굽히거나 아첨함이 없는 것을 이름이다. 두루 중외에 이름을 드날려서 사람들이 청렴 정직하다고 칭찬하였다. 아들이 다섯이니, 최사위(崔士威최사의(崔士儀최사규(崔士規최사강(崔士康최사용(崔士庸)이었다.

태백산사고본112531B영인본1674분류*인물(人物) / *수산업-염업(鹽業) / *농업-전제(田制) / *역사-고사(故事) / *왕실(王室)

[2585]판도 좌랑(版圖佐郞) : 고려가 원()의 지배하에 들어갔을때 호부 좌랑(戶部佐郞)을 고친 이름.[2586]염분(鹽盆) : 소금가마.[2587]전민(田民) : 땅과 백성.[2588]위주(僞主) : 우왕(禑王).[2589]유휴사(留後司) : 개성(開城).[2590]척당(倜儻) : 기개가 있어서 남에게 구애받지 않음.

 

   ***고려말 조선초 죽정(竹亭) 최유경(崔有慶)의 생애와 활동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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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e Yu-gyeong's Life and Activities during the late Goryeo to early Joseon Periods

김성환(Kim Sung-hwan) 저 간행물명 : 포은학연구 /: 圃隱學硏究 13 / 2014 / 223~256 (pages)

발행기관 : 포은학회 간행물유형 : 학술저널 주제분류 : 기타인문학 파일형식 : PDF  한국어초록

   *고려후기에 전주최씨는 최득평과 최재의 조정에서의 활동과 신진사대부와의 통혼을 통해 사회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리고 최재의 아들인 최유경이 음직과 과거 두 방향에서 관로에 진출함으로써 이후 사대부가로서의 위치를 확립했다. 그는 중원과 자국의 왕조 교체라는 동북아시아의 격변을 몸소 체득하며 40대 중반에 위화도회군, 50대 후반에 태종 즉위의 추인을 위한 명나라 사행을 경험하고 실행했다. 염창(鹽倉)의 정비, 환관 윤충좌(尹忠佐)의 탄핵, 이사충(李思忠) 가노(家奴)의 주인살해미수사건 처리, 전민(田民)의 추고(推考)와 변정 등은 최유경이 출사 이후 위화도회군 이전까지 처치한 일이었고, 그 평은 긍정적이었다.

남부지방의 왜구를 퇴치하기 위해 40대 초반의 이성계와 30대 중반의 최유경은 도원수와 부원수로 만났다. 이후 1388년 요동정벌에 참전했으나, 최유경은 이성계가 주도한 위화도회군에 부정적이었다. 그런데 그는 원래 최영보다 이성계와 뜻을 함께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최유경이 회군을 우왕에게 보고한 것은 회군 자체에 대한 반대이기 보다 당시 군영과 민간에 만연해 있던 '목자득국참(木子得國讖)'과 관련한 동요 때문이었다. 그의 배반행위에도 불구하고, 왕에 대한 충의로 이를 포용하고 계속 중용했던 이성계의 속내는 막료로서 그에 대한 철저한 신임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하지만 최유경은 신왕조 건설 세력에게 일정하게 배제되었다. 그가 신왕조에서 본격적으로 등용된 것은 정국 안정의 도모를 위해 전왕조의 신료를 회유하기 위해 이루어진 1395년의 원종공신 녹훈부터였다. 이후 최유경은 태안에서의 운하 건설을 검토하고, 한양도성 건설의 책임을 맡았다. 그가 조선왕조에서 이렇게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포치(布置)하는 재주가 있다'는 것으로 대표할 수 있는 이성계의 절대적인 신임 때문이었다.

최유경은 태종 즉위에 대한 명나라 황제의 고명(誥命) 획득과 요동의 군사적 상황에 대한 정보 수집을 목적으로 명나라 사행을 했다. 그러나 태조의 사망 즉시 그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고, 이후 정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토목건축은 물론 음양천문지리 등에도 능했다. '포치의 재주'는 그의 다양한 학문의 섭렵과 강직하고 청렴공근한 처신, 주변을 아우르는 포용 등을 의미했다.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titleListIframe.jsp%3FbizName=MK%26gunchaid=av001%26muncheId=01%26seojiId=kc_mk_m022 목은시고 제32권 시()

공주 목사(公州牧使) 최유경(崔有慶)에게 답하면서 급히 붓을 달리다.

부친의 풍도 이어 청백하고 공근하니 / 淸白公勤繼父風 공사에 인정을 흠뻑 베풀 줄 알고말고 / 已知仁政洽於公

무더위에 시달리는 병객이 안타까워 / 應憐病客愁炎熱 은하수 대신 찻종을 보내 준 것이렷다 / 欲代銀河寄茗鍾

 

한국고전번역원 이상현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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