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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1398년 태조 7년에 건립되다

숭례문은 한양도성의 남문으로 태조 7년(1398)에 건립되었다. 조선은 건국과 함께 한양으로 수도를 천도하면서 종묘와 사직, 궁궐, 도성의 순으로 도시 기반을 건립함으로써 수도의 면모를 갖추어 갔다. 도성의 공사는 태조 4년(1395)에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을 설치하고, 태조 5년(1396) 1월 9일 민정 11만여 명을 징발하여 작업구역을 할당하고, 도성개기(都城開基)의 제사를 치르면서 시작되었다. 숭례문에는 별도의 성문제조(城門提調)를 두어 성곽공사와 구분하여 숭례문 공역의 중요성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숭례문 공사는 태조 7년(1398) 2월 8일 태조가 직접 숭례문을 둘러봄으로써 공사가 완료된 것을 알 수 있다.

숭례문의 건립 과정을 살펴보면, 태조 5년(1396) 1월 도성 축조가 시작되면서 성문도 같이 시작되었거나 늦어도 성문제조가 거론된 동년 8월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음 해인 태조 6년(1397) 10월 6일에 상량하였으며, 태조 7년(1398) 2월 8일에 숭례문의 공사기 완료되었다.

이러한 기록에 따르면 공사의 총 기간은 약 2년가량이 걸렸으나, 실제 농번기 등을 이유로 정역한 기간을 빼고 보면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공사가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숭례문은 안산인 목멱산과 우백호인 인왕산이 내려와 만나는 서남쪽의 고개에 해당하는 위치에 놓여있다. 도성의 정남쪽에는 목면산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지형적 여건에 맞춰 도성의 남문인 숭례문이 서남쪽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산줄기가 만나는 지형적 조건 때문에 터를 평활하게 개토하여 지대를 만들고 문루를 쌓았으며, 좌우로는 성곽으로 연결하였다. 초축 당시에 좌우의 성곽이 토성이었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성벽 연결부 해체 시 내부에 정연한 판축다짐이 확인되어 숭례문 좌우 성곽이 토성이었을 가능성이 제기 되기도 하였다.

한편 숭례문 초창 때 쓴 상량묵서를 통해 공사 참여자를 확인할 수 있는데, 성문제조 최유경을 비롯 도성제조 이빈, 제조와 별간역 등 관리조직에 24명의 이름이 확인되어 공사관리와 지원 등의 업무를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참여 공장으로는 석수와 대목만이 나타나는데, 다른 공장이 참여하지 않았다기 보다는 이들이 대표되는 공장으로 보이며, 공장의 조직이 그만큼 정립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장인으로 석수가 대목보다 앞에 나와 석공사가 규모나 범위 면에서 목공사보다 큰 것으로 보이며, 대목 설명에서 “大木法輪寺OOOOOOOO覺希”로 나와 법륜사라는 어느 절의 어떤 직책을 맡은 각희(覺希)라는 승려가 참여하였다는 것에서 사찰의 불사 건축에 경험이 있는 승려를 관영건축에 참여토록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도성공사에 민정을 징발하고, 문루공사에 공장으로 승려가 참여한 것으로 볼 때 관청 영선조직이 아직 체계화 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숭례문 공사를 책임질만한 능력을 가진 공장이 관청에 없었기 때문에 기능이 뛰어난 승려 장인을 대목으로 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세종, 숭례문 건립 이후 50년 만에 첫 수리

숭례문은 태조 때 건립한 이후 정확히 50년 만에 다시 수리하였던 기록이 나타난다. 세종 15년(1433) 7월 조정에서 숭례문을 수리하고자 하는 논의가 있었다.


“나는 남대문이 이렇게 낮고 평평한 것은 필시 당초에 땅을 파서 평평하게 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제 높이 쌓아 올려서 그 산맥과 연하게 하고 그 위에다 문을 설치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

남산과 인왕산 자락이 만나는 언덕부분을 평평하게 땅을 파서 숭례문을 건립한 이후 주변지형이 높아지면서 상대적으로 숭례문이 낮아지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그 결과로 우수의 유입 등으로 숭례문의 구조에 문제가 생겼을 것으로 추측된다. 때문에 숭례문을 올려 쌓아야 한다는 것이며, 세종도 숭례문의 지대가 낮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같은 해 7월 부역 시행을 늦출 것을 상소하는 내용에서 “南大門 改築土…”, “…南大門 土築改造…”의 내용이 나온 것으로 볼 때 숭례문 주변의 지반 정비, 즉 지대를 높이는 일의 필요성을 언급하였다.

숭례문의 수리는 개건의 언급 이후, 14년 뒤에 숭례문 수리를 하였으나, 앞선 기록에 따라 숭례문의 지대를 올렸는지 주변 지반만을 올렸는지에 대한 사실 여부는 문헌상으로는 명확하게 들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발굴조사 결과 초창의 지대석과 하부면석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세종 때의 지반이 태조 때보다 30cm 정도 성토된 위치에 나타나며, 장기간에 걸쳐 성토된 층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발굴결과로 보면 문헌과 같이 세종 때에 숭례문을 높게 쌓아 올리지는 않았지만, 사료의 기록에서와 같이 세종 때에 지반을 올렸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숭례문의 수리는 세종 29년(1447) 8월 31일 좌참찬 정분을 역사 감독으로 임명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12일에 사헌부에서 추위를 이유로 왕에게 정역할 것을 건의하여 공역이 잠시 중지되기도 하였다. 숭례문 문루에 남아 있던 세종 때의 상량묵서에는 30년(1448) 3월 17일 입주(立柱)한 것으로 기록되었고, 같은 해 5월 12일에 공역이 이미 끝났다고 하였다.

따라서 1447년은 기존 숭례문 해체와 보충되는 목재를 치목하는 등 준비과정이고, 다음해인 1448년에 목재 조립과 마무리 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 문헌상에 신작(新作)의 표현으로 보아 문루를 크게 수리한 것을 당시에는 새롭게 짓는 것으로 인식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1910년 숭례문의 모습

수리를 담당한 조직으로 제조에 정헌대부의정부좌참판호조사 정분(鄭笨)과 자헌대부형조판서 민신(閔伸)이고, 감독관리자로 선공감직장 이명민, 부사직 김부흥이 언급된다. 선공감직장 이명민(李命敏, 미상∼1453년)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1448년(세종 30) 내불당(內佛堂)을 짓는 일을 감독한 뒤, 호조좌랑‧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지내며 토목공사의 일을 잘 맡아 하였던 인물이다. 또한, 선공감은 조선시대 토목(土木)•영선(營繕)의 공급을 맡던 관청이며, 직장은 종7품의 직위이다.

그 아래 나타난 참여 장인을 보면 대목은 사직(司直)이란 관직의 최건O(崔健O)이고, 부석수 역시 사직이란 관직의 신내행(申乃行)이란 사람이 참여하였다. 사직은 조선시대 5위(五衛)에 소속된 정5품 무관직으로 관리직인 이명민보다도 직위가 높아 대목과 부석수가 지휘통제나 간섭보다는 주도적으로 맡은 바 임무를 추진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목 아래 좌변목수와 우변목수를 두고, 도석수 아래 좌변석수와 우변석수를 두어 해당 분야의 일을 분담하였다. 다른 장인인 조각장, 안자장, 노야장 등은 목수와 도석수 아래 편입되어 조력자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목, 도석수, 좌변목수, 우변목수 등은 관직이 있어 선공감에 소속된 공장조직으로 판단된다.

세종 때의 공장조직은 태조 때의 관청 영선조직이 확립되지 않았던 것에 비해서 세종 때는 이러한 관청 영선조직이 어느정도 정립되어 우수한 기량을 갖춘 장인을 확보하였음을 알려 준다. 또한 태조 때에 석수와 대목만이 나온 것과 비교하면 공장의 분담이 이루어져 작업한 것으로 후기의 세분화된 공장조직으로 점진적으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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